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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화재에 폭발하는 분노 “통치의 민낯”

박지혜 기자
2025-11-29 07:15:56
사망 128명·실종 200명 참사에 안전감독 부실 비판 확산
“수개월 전부터 경고했는데”…주민 민원 묵살한 당국에 분노
“견제 시스템 사라진 홍콩, 구조적 비극 예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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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화재에 폭발하는 분노 “통치의 민낯 드러났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26일 홍콩 북부 타이포구 32층 공공분양 아파트 단지 ‘웡 푹 코트’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가 43시간 만에 진압됐지만, 사망자 128명에 실종자 200여명이라는 참담한 피해 규모가 확인되면서 홍콩 사회에 분노가 들끓고 있다.

28일 홍콩 성도일보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이번 화재는 1948년 창고 폭발 사고(176명 사망) 이후 77년 만의 최악의 인명 피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부상자는 소방관 12명을 포함해 79명이며, 주민 900여명은 인근 학교와 체육관 8곳에 대피한 상태다.

분노의 핵심은 ’인재(人災)’라는 점이다. 주민들은 지난해 7월 시작된 외부 보수공사 과정에서 화재 위험성을 수차례 당국에 경고했다. 지난해 9월에는 가연성 보호망의 위험성을 구체적으로 제기했지만, 홍콩 노동부는 “화재 위험이 비교적 낮다”며 공사 중단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28일 당국 발표에 따르면 화재는 저층부 외벽에 설치된 그물망에서 시작돼 스티로폼 패널과 대나무 비계를 타고 32층까지 급속히 번졌다. 주민들이 우려한 바로 그 지점에서 불이 시작된 것이다.

타이포 출신 전 홍콩 구의원 마이클 모는 “주민들이 수개월 전부터 시공사의 부실 공사와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며 “지난해 홍콩 노동국은 ‘보수공사에는 불꽃 작업이 없어 비계에서 화재가 발생할 위험이 낮다’고 안내했지만, 비계 재료의 난연 기준조차 관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홍콩 경찰과 반부패 수사기구 염정공서(ICAC)는 웡 푹 코트 보수공사 과정에서의 부패 의혹에 대한 형사 수사에 착수했다. 현재까지 공사업체 및 관리회사 관계자 5명이 과실치사 혐의로 체포됐으며, 3억3000만 홍콩달러(약 622억원) 규모의 공사 예산 집행 과정에서 비자금 조성과 낙찰 비리 여부까지 조사 중이다.

현지 언론은 해당 업체가 안전 규정을 상습적으로 위반했다는 보도를 연이어 내놓고 있다. 화재 경보 시스템 일부가 작동하지 않아 초기 대피가 늦어진 점도 확인됐다.

존 리 홍콩 행정장관이 화재 원인으로 대나무 비계를 지목하고 금속 비계로 대체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히자, 상당수 홍콩 시민들은 반발하고 있다.

실제 화재 현장에서 대나무 비계는 일부 무너지긴 했지만 불에 타지 않고 형체를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불길에 소실된 것은 비계 사이에 설치된 녹색 안전그물이었다. 일각에서는 대나무 비계를 홍콩 건설 문화의 중요한 유산이자 정체성으로 평가하며, 당국이 미흡한 안전관리를 감추려 전통 건축 방식에 책임을 떠넘긴다고 비판한다.

영국 가디언은 “홍콩 주민들 사이에서 화재 원인을 둘러싼 분노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며 “극도로 높은 집값 탓에 많은 시민이 고층 아파트에 빽빽하게 거주하고 있어, 이런 구조가 재난 시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위험성을 노출했다”고 보도했다.

과거 홍콩은 대형 참사 발생 시 독립 판사가 주도하는 공개 조사위원회를 설치해왔지만, 이번 사건에서 같은 절차가 진행될 가능성은 작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중국 중앙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홍콩의 사법 독립성이 크게 약화됐기 때문이다.

마이클 모는 “홍콩 정부는 코로나19 때도 독립 조사를 하지 않았다”며 “이번 사건에 독립위원회를 꾸린다면 존 리 행정장관은 정치적으로 끝장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2019년 이전에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당국에 대한 견제가 있었지만 이제는 이런 장치들이 사라졌고, 정부를 더 효율적이고 책임 있게 만들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하는 지역 중 하나인 홍콩에서 건물 안전 시스템이 취약성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높아지고 있다”며 “일각에서는 이번 재난이 부패와 책임회피의 결과가 아닌지 질문을 던진다”고 전했다.

전 홍콩 민주당 주석 에밀리 라우는 NYT에 “이번 참사의 규모가 정부 감독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며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다. 홍콩은 이런 곳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은 위법행위와 관련해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라고 말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화재 진압과 피해 최소화를 위해 ‘전면적 노력’을 지시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시 주석이 희생자와 순직 소방관에 대한 애도를 전하고 홍콩 당국의 수습 작업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BYD, 지리, 알리바바 등 중국 주요 기업들은 수천만 홍콩달러 규모의 구호 기부를 약속했다. 중국 국방부 대변인은 “인민해방군이 언제든 도시를 지킬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홍콩 정부는 사망자 유가족에게 20만 홍콩달러(약 3800만원)의 위로금과 피해 세대에 긴급금 1만 홍콩달러, 생계비 5만 홍콩달러를 지급하기로 했다. 피해복구 지원을 위한 3억 홍콩달러(약 567억원) 규모의 기금도 조성한다.

존 리 행정장관은 12월 7일 예정된 입법회(국회 격) 선거 연기 가능성도 언급했다. 홍콩 정부는 2020년에도 코로나19를 이유로 선거를 연기했는데, 당시 민주 진영에 큰 타격을 준 조치였다는 점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불안을 자극하고 있다.

로이터는 이번 화재 참사가 “2019년 대규모 민주화 시위 이후 변화해 온 중국의 홍콩 장악력에 대한 주요 시험대”라며 “대중의 분노가 건설사를 넘어 소방안전·건축물 규제 당국으로까지 확산할 수 있으며, 광범위하고 공개적인 조사를 요구하는 압력이 커질 수 있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70여 년 만에 발생한 최악의 화재가 베이징의 홍콩 통치력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며 “치솟는 집값으로 재난에 취약한 밀집된 고층 아파트에 살아야 하는 홍콩의 주거 불안이 드러났다”고 분석했다.

1997년 중국 반환 이후 일국양제 원칙에 따라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받았던 홍콩은 2019년 민주화 시위 이후 홍콩국가보안법 시행 등으로 ‘홍콩의 중국화’가 가속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1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대형 참사가 발생하자, 중국이 홍콩에 대한 정치적 통제는 강화하면서도 정작 민생 안전에는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낸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홍콩 당국은 대규모 보수공사 중인 아파트단지를 전수조사해 안전 상태를 점검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독립적인 조사 없이 정부 주도의 수습만으로는 시민들의 분노와 불신을 해소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박지혜 기자 bjh@bn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