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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⑫] 구두 수십 켤레, 그런데 맨발인 이유

김연수 기자
2026-04-30 16: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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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⑫] 구두 수십 켤레, 그런데 맨발인 이유 (김현정, <내숭: 공(空)> ,110 x 180 cm,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쥬, 2013. / 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풍요는 때로 결핍보다 더 큰 공허를 만든다. 옷장은 가득한데 입을 옷이 없고, 신발장은 넘치는데 오늘 신을 구두가 없다. 필요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결정하지 못한다. 선택지는 많아졌지만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유난히 트렌드에 예민하다. 새로 나온 것, 지금 유행하는 것, 사람들이 몰리는 것에 빠르게 반응한다. 그런데 그 유행이라는 것은 정말 우리의 필요에서 시작된 것일까.

〈내숭: 공(空)〉은 그 이상한 풍요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작품이다. 화면 속 인물은 한복 차림으로 바닥에 앉아 있다. 주변에는 수많은 구두가 흩어져 있다. 붉은 구두, 검은 구두, 자수가 놓인 구두, 높은 굽의 샌들, 장식이 화려한 신발들이 인물을 둘러싼다. 양손에는 각기 다른 구두를 들고 있지만 표정에는 선택의 즐거움보다 멍한 피로가 먼저 보인다. 맨발로 앉아 있는 인물은 많은 신발을 가졌지만 아직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신을 것이 없다”는 사소한 말이 이 화면 안에서는 현대 소비사회의 깊은 허전함으로 바뀐다.

이 작품에서 구두는 단순한 패션 소품이 아니다. 구두는 외출의 도구이자, 사회 앞에 등장하는 방식이다. 어떤 구두를 신느냐에 따라 오늘의 태도, 취향, 계급감, 기분이 달라 보인다. 그래서 구두는 발을 보호하는 물건이면서 동시에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가’를 드러내는 작은 간판이 된다. 화면 속 구두들은 저마다 다른 색과 형태로 개성을 주장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두 비슷한 소비 상품의 군집처럼 보인다. 각기 다르다고 말하지만 결국 같은 욕망의 선반 위에 놓인 물건들이다.

눈썰미가 좋다면 일부 구두의 상표 자리에 ‘김현정’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질문은 한층 복잡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소비하고 있는가. 물건인가, 이미지인가, 타인의 시선인가, 아니면 이름과 정체성인가.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브랜드가 된다. 옷차림, 취향, 말투, 일상, SNS에 올리는 한 장의 사진까지 모두 자기 소개가 된다. 문제는 그 자기 소개마저 소비를 향해 조직된다는 점이다. 더 잘 보이기 위해 사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사고, 나다운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또 산다.

결국 오늘의 브랜딩은 기업만의 언어가 아니다. 기업은 상품을 팔기 위해 이미지를 만들고, 개인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브랜딩한다. 기업의 브랜딩은 소비자의 욕망을 만들고 개인의 브랜딩은 자기 자신을 다시 소비 가능한 이미지로 만든다. 모두가 자신을 설명해야 하고, 모두가 자신을 팔아야 하는 시대다. 그래서 이 풍요는 어딘가 서글프다. 상품은 넘치지만, 그 안에서 사람은 자꾸 상품처럼 정리된다. 취향은 자유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경쟁의 언어가 된다.

커피를 생각해도 그렇다. 한국인이 원래부터 커피를 이토록 사랑해서 커피전문점이 많아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도시의 거의 모든 거리마다 카페가 들어서면서 커피를 마시는 생활이 일상의 기본값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필요가 시장을 만든 것인지, 시장이 습관을 만든 것인지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제 선택하지 않을 자유보다 선택해야 하는 압박에 더 자주 놓인다는 점이다. 마시고 싶어서 마시는 한 잔과, 마셔야 할 것 같아서 들고 있는 한 잔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트렌드도 비슷하다. 기업은 물건만 팔지 않는다. 삶의 방식과 기분, 계절의 감각과 미래의 불안을 함께 판다. 새 구두는 단지 새 구두가 아니라 새로운 나, 새로운 출발, 더 세련된 오늘의 약속처럼 제시된다. 새 옷은 몸을 가리는 천이 아니라 뒤처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렇게 소비는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확인의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물건을 사면서 잠시 안도한다. 아직 트렌드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다고, 아직 시대의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는다. 공급은 계속되고, 유행은 교체되며, 선택지는 더 많아진다. 많아질수록 만족은 커지는 대신 더 빨리 낡아진다. 이것이 〈내숭: 공(空)〉이 보여주는 풍요의 역설이다. 구두가 많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구두가 많아졌기 때문에 더 결정하지 못한다. 옷이 많아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옷이 많아졌기 때문에 더 비어 보인다. ‘공(空)’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이 쌓였는데도 정작 마음이 닿을 곳이 없는 상태다.

이 공허는 개인의 허영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소비에는 개인의 욕망이 있다. 하지만 그 욕망은 사회가 만든 환경 안에서 자란다. 광고는 끊임없이 부족함을 발견하게 만들고 플랫폼은 새로운 상품을 눈앞에 밀어 넣으며 브랜드는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불안을 정교하게 다듬는다. “이것이 필요하다”고 직접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지금의 감각”이라고 보여주면 충분하다. 그러면 사람들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을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공급은 어느새 욕망의 언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지구적 불균형까지 떠올리게 한다. 지구 한편에서는 물자가 부족해 생존이 위태롭고, 다른 한편에서는 너무 많은 물건이 삶의 피로가 된다. 누군가에게 신발은 이동과 보호를 위한 최소 조건이지만, 누군가에게 신발은 선택의 피로와 자기 연출의 부담이 된다. 부족해서 고통받는 세계와 넘쳐서 공허해진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 풍요로운 사회가 반드시 성숙한 사회는 아니라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넘치는 물건은 때로 사람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더 촘촘히 묶어 둔다.

〈내숭 시리즈〉에서 이 무거운 문제를 훈계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복을 입은 인물은 고상한 듯 앉아 있지만, 속으로는 구두 앞에서 흔들린다. 반투명한 한지 콜라주로 표현한 한복은 단아한 전통의 외피를 유지하면서도, 그 안의 욕망과 망설임을 완전히 숨기지 않는다. 한국화의 여백은 비어 있지만, 그 비어 있음은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품게 한다. 화려한 구두들은 선명하게 빛나고, 인물의 표정은 무채색에 가깝다. 물건은 또렷한데 마음은 흐릿하다. 나는 이 대비 안에 〈내숭: 공(空)〉이 말하고자 하는 공허를 담고 싶었다.

〈내숭: 공(空)〉은 묻는다. 오늘의 소비는 나를 채우는 행위인가, 잠시 비어 있음을 가리는 행위인가. 우리가 다시 살펴야 할 것은 새 구두가 아니라, 그 구두를 사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의 출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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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⑫] 구두 수십 켤레, 그런데 맨발인 이유 (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한국화가 김현정은 선화예중·예고와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대 한국인의 삶과 감정을 유머와 풍자로 풀어낸 21세기 풍속도 〈내숭 시리즈〉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모습을 ‘한국의 초상’이라는 시선으로 그려 왔다. 또한 아트 컬래버레이션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코카콜라, 현대자동차, MBC, 한국조폐공사, 신세계백화점, LG생활건강, 네스카페, 해태제과 등 다양한 브랜드 및 기관과 협업해 왔다. EBS ‘해요와 해요’에서 댕기언니로 활동했으며 서울시와 희망브릿지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30만 팔로워와 소통하며 국내외 전시와 강연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글_김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