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자리를 다시 흐르지 않는 강물처럼 세월은 묵묵히 낙동강 곁을 지나왔다. 겨울 화포천은 멀리서 찾아오는 철새 등 생명들을 넉넉히 보듬고, 사람의 따스한 손길로 피어난 튤립은 누구보다 먼저 봄을 맞이할 채비를 한다.

저마다의 애틋한 기억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사람들과, 사시사철 변함없는 자연이 함께 숨 쉬는 낭만의 도시. 과거의 향수와 현재의 역동성이 맞닿는 경상남도 김해시로 KBS 1TV '동네 한 바퀴'가 360회에서 여정을 떠나본다.

낙동강 100년 역사를 가로지르는 레일바이크

폐선 철로를 따라 그림처럼 조성된 3km 구간에서는 탁 트인 낙동강을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하며 계절이 바뀌는 생생한 공기를 느낄 수 있다. 오랜 시간의 묵직한 이야기를 품은 철교는 이제 여행객들의 웃음과 추억이 더해지는 낭만적인 공간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힐링을 즐기는 김해의 대표 관광지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 장어구이 식당
김해의 한 골목에는 3대째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온 연탄불 장어구이 집이 있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인적 드문 텅 빈 거리에서 힘겹게 문을 연 이 작은 가게는 오늘날 북적이는 낙동강 장어타운의 든든한 시작점이 되었다.

현대화된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매캐한 연탄불을 굳이 고집하는 것이 이 집만의 절대적인 비결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변함없는 추억의 옛 맛을 오롯이 지키기 위해서다. 어머니 순자 씨의 투박하지만 깊은 손맛은 자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고, 덕분에 세월이 흘러도 장어의 맛은 언제나 한결같다. 6·25 전쟁 이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절박하게 시작한 장어 장사. 이제 백발이 성성한 순자 씨에게 돈은 더 이상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멀리서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넉넉하고 정갈한 밑반찬과 함께 정성 어린 한 상을 푸짐하게 내어주는 것, 그 소박하고 따뜻한 기쁨이 오랜 세월 가게를 지켜온 원동력이 되었다.

어머니의 마음과 애틋한 기억이 담긴 우표전시관
그림 그리기를 유독 좋아하는 자식을 생각한 어머니는 매일 배달되는 우편물에서 정성스레 떼어낸 우표를 한 장 한 장 소중히 모았다. 그 작은 종이 조각들에는 자식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애틋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렇게 시작된 평범한 수집은 긴 세월을 건너 지금의 훌륭한 우표전시관으로 이어졌다.

안만기 관장은 오랜 추억과 역사가 담긴 우표들로 소박한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관장에게 우표는 단순한 취미나 수집품이 결코 아니다. 예쁜 편지지를 고르고, 진심 어린 글로 마음을 담아내고, 우표를 침 발라 붙이기까지의 설레는 전 과정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굳게 믿는다. 60년 전, 머나먼 이국땅 월남으로 파병을 떠났던 아버지의 생사 소식 또한 그렇게 한 장의 우표를 통해 전해졌다. 타지에서 보낸 눈물겨운 편지와 그 겉봉에 붙은 우표는 가족의 생사를 잇는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다. 삶이 다하는 끝날까지 우표 수집을 멈추지 않겠다는 그는, 지금도 사람들과 엽서와 편지를 쓰는 뜻깊은 행사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언젠가 자신이 세상에 없더라도, 따뜻한 마음만은 우표와 함께 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기를 바라는 것이 관장의 가장 큰 소망이다.

따스한 애정으로 희망의 꽃을 피워내는 튤립 농사꾼
나이 드신 부모님의 일손을 돕기 위해 번듯한 직장을 뒤로하고 김해로 내려온 윤정 씨. 2019년 갑작스럽게 닥친 팬데믹으로 꽃의 수요가 급감하면서, 평생 화훼 농가를 운영하던 부모님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애써 피워낸 아름다운 꽃들을 시장에 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버려야 하는 참담한 상황 속에서, 윤정 씨는 과감히 본업을 관두고 튤립 농장에 두 팔 걷어붙이고 나와 본격적으로 꽃 일을 시작했다.

자신만의 젊고 트렌디한 방식으로 꽃 시장을 분석해 품종을 다채롭게 늘리고, 온라인 판로를 넓히며 절망적인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바꿔나갔다. 윤정 씨의 부모님은 흙투성이가 된 딸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생시키는 것 같아 늘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6,600㎡ 규모의 거대한 농장은 매일 가족의 부지런한 손길로 정성껏 가꿔진다. 훈훈한 봄기운이 가득한 비닐하우스 안에서는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머물고, 환한 웃음꽃이 오간다. 꽃을 가져갈 새로운 주인의 미소를 떠올리며 정성껏 꽃을 키우는 가족의 마음은, 만개한 튤립의 빛깔처럼 화사하고 따뜻하다.

대숲을 빼닮은 부부의 넉넉한 인심, 대통오리구이 식당
모든 것이 얼어붙는 삭막한 겨울에도 푸른 생기를 잃지 않는 올곧은 대나무숲. 무려 45년째 묵묵히 그 숲을 일궈온 ‘대통오리구이’ 사장님 부부가 있다. 거친 황무지나 다름없던 땅을 울창하고 아름다운 대나무밭으로 키워내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눈물의 날들이 있었다. 사시사철 푸른 댓잎처럼 변함없이 서로를 지켜준 부부의 끈끈한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눈부신 대숲이 가능했다.

수많은 땀과 시행착오를 겪어낸 부부는,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대나무처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정성과 건강을 듬뿍 담은 음식을 대접한다. 이 집의 대표 메뉴는 무려 13가지 귀한 한약재와 은은한 댓잎을 정성껏 달인 물로 조리한 대통오리구이다. 커다란 대나무 통 안에서 은은하게 쪄내듯 익은 오리는 깊고 진한 댓잎 향을 머금고, 부드러운 고기 육질과 정갈하게 곁들여진 채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상 다리가 부러질 듯 푸짐하게 차려진다. 수많은 실패와 시도 끝에 비로소 완성된 이 특별한 맛에는, 지나온 세월 부부가 흘린 땀방울과 자부심이 훈장처럼 담겨있다.

삶의 지난한 흔적으로 맑은 시를 쓰는 환경미화원 시인
세상에서 쓸모를 잃고 버려진 것들 속에서 빛나는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특별한 환경미화원이 있다. 거리를 청소하는 매 순간 머릿속에 문학적 영감이 떠오른다는 금동건 시인이다. 남들이 외면하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마른 낙엽과 버려진 쓰레기, 심지어 코를 찌르는 음식물 쓰레기조차도 그의 투박한 손끝에서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된다. 지금까지 무려 6권의 시집을 출간한 베테랑 시인인 그는, 빗자루질을 하다가도 영감이 떠오르면 즉석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시를 써 내려간다.

청소와 삶의 가장 큰 공통점은 욕심을 내려놓는 ‘비움’에 있다고 담담히 말하는 시인. 그가 유독 궂은 청소 일에서 영감을 얻는 데에는, 과거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절망했던 시련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렵고 캄캄했던 터널을 이겨낸 그는, 남들보다 일찍 일어난 새벽마다 어두운 거리를 깨끗하게 치우며 사람들의 맑은 하루 시작을 더 눈부시게 빛내주는 데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자연과 함께하는 한, 시인이 된 청소부는 결코 외롭지 않다.” ‘환경미화원 금동건’이 쓴 이 담백한 한 구절에는 시인이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깊은 시선이 오롯이 담겨있다. 힘이 닿는 한 청소용구와 펜을 놓지 않겠다는 그의 굳은 다짐도 시와 함께 세상을 맑게 비춘다.

지나간 낡은 시간은 아름다운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또다시 낭만으로 우리 곁에 되살아난다. 크고 작은 소중한 추억을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담은 경상남도 김해시 편 '동네 한 바퀴' 방송 시간은 3월 7일 토요일 저녁 7시 10분이다.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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