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NA 월화드라마 ‘아너 : 그녀들의 법정’(이하 ‘아너’) 최종회에서 백태주(연우진)가 구축한 비틀린 세계는 처참히 무너졌다. ‘더프라임’의 스마트시티 시연회장에서 강신재(정은채)가 서버에 심은 장치로 백태주의 음성이 공개되며, 비밀 성매매 어플 ‘커넥트인’이 피해자들을 미끼로 설계된 범죄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 동시에 서버실에 감금된 강신재가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송출돼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백태주의 몰락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았다. 로펌 L&J(Listen & Join)를 재정비한 윤라영과 황현진은 ‘커넥트인’ 피해자 변호를 맡아 싸웠지만, 형사 소송 1심에서 이용자들의 성매매 혐의는 벌금형에 그친 반쪽짜리 판결이 나왔다. 윤라영은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방송에 출연해 커넥트인 특별법안 발의를 촉구하며, 민사소송으로 이용자들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복수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범죄를 자수한 딸 한민서(전소영)의 곁도 지켰다. 모녀 관계가 하루아침에 회복되지는 않았다. 한민서는 여전히 착취당한 지옥과도 같은 과거에 대한 증오를 떨치지 못했지만, 윤라영은 평생이 걸려도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다. 강신재는 무너진 해일의 대표 자리를 맡아, 추징금과 손해배상 등 짊어져야 할 책임을 떠안았다.
상처가 사라지거나 잃어버린 것들이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 무게를 견디며 살아내는 것은 누군가의 악의를 넘어선 승리이며, 그렇게 지킨 매 순간은 찬란한 명예였다. 하지만 이들의 연대와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폭행으로 엉망이 된 채 L&J 사무실 문을 다급히 두드리며 “도와달라”는 또 다른 성범죄 피해자가 찾아온 것. 판타지 같은 해피엔딩보단, 끝까지 현실을 놓지 않은 ‘아너’다운 엔딩이었다.
지난 3회에서 방송에 출연한 윤라영은 법대 동기 세 친구가 의기투합해 공익 로펌 L&J를 만든 이유를 묻는 진행자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포털 사이트에 성범죄 로펌을 검색하면, 피해자가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가해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아주겠다는 홍보 글이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편에서, 무슨 일을 겪었든 함께 싸워주는 변호사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L&J가 “듣고 함께 한다”는 뜻을 가진 이유이기도 했다.
윤라영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해야 하는 고통 속에서도,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강신재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결단으로 진실을 밝혔고, 황현진은 피해자들 곁에서 끝까지 버티며 함께 싸워나갔다. 변호사 3인방의 연대는 숨기고 감출 수밖에 없었던 성착취 피해자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고, 이들의 또 다른 연대를 이끌었다. ‘갖고 싶은’ 명예로운 변호사 캐릭터의 탄생이었다.
도파민을 추구하는 현시대에 ‘아너’는 판결의 쾌감이나 응징의 카타르시스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단, 불편한 진실과 그로 인해 야기된 진짜 현실에 주목했다. 디지털 성착취 플랫폼 ‘커넥트인’을 중심으로 권력과 자본이 결탁한 구조적 성범죄를 정면으로 다루며, 빌런의 악행을 넘어 그 시스템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유지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침묵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럼에도 매회 시청률 상승 곡선을 그리며 더 많은 시청자가 ‘아너’를 보게 한 힘은 박가연 작가가 완벽하게 설계한 촘촘한 미스터리 서사를 시의 적절하게 밀고 당기며 밀도 높게 영상으로 풀어낸 박건호 감독의 완벽한 ‘작감의 합’에 있었다.
“기존의 사이다 법정물이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르고, 복수극이 감정의 해소에 집중한다면, ‘아너’는 그 중간 어디에서 판결 이후에도 질문을 남기는 드라마”라는 메시지를 전했던 박건호 감독.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감정이 깔끔하게 정리되기보단, 오히려 그 이후에 찾아오는 여운과 불편함을 담아냈고, 그 불편함이 오래 남는 질문이 되길 희망했던 그 용기 있는 감독과 작가의 바람은 미스터리 장르의 긴장감과 사회적 메시지를 동시에 완성하며 ‘아너’만의 명예로운 세계를 구축했다.
부서져도 무너지지 않은 L&J 변호사 3인방의 치열한 투쟁에도,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커넥트인’ 이용자들의 권력형 비리엔 심판이 내려졌지만, 성매매 혐의는 벌금형에 그쳤다. 권중현(이해영)을 필두로 ‘커넥트인’ 회원들은 피해를 주장하며, 강신재가 맡은 해일에 천문학적 위약금의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게다가 특별출연한 배우 엄지원이 연기한 성매매 카르텔의 새로운 관리자도 등장했다. 그는 SNS 영향력을 가진 젊은 여성들을 모집해 VVIP들을 위한 파티를 열었고, 또 다른 성착취 피해자를 만들었다. 견고하고 은밀한 그들만의 카르텔을 또다시 쌓은 것이다.
공분을 일으키는 씁쓸한 현실 속에서도 명예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너’가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어느 날 문득 고통이 그친다거나, 상처가 씻은 듯 아무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들은 영원히 되찾을 수 없고, 오롯이 홀로 그 무게를 견뎌야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이 살아 숨쉬고 삶을 계속 이어가는 한, 존엄성과 명예는 짓밟으려던 거대악은 실패하는 것이 된다. 최종회에서 ‘커넥트인’ 피해자들은 복학, 카페 매니저, L&J 인턴 등으로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갔다. 흉터를 안고도 살아남은 이들의 하루하루, 매 순간은 그래서 더욱 찬란하고 명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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