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이부진이 주총장에서 ‘시스루’ 입은 이유

서정민 기자
2026-03-23 06:01:50

기사 이미지
이부진이 주총장에서 ‘시스루’ 입은 이유 (사진=호텔신라)
매년 주주총회 시즌이 돌아오면 재계의 시선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발언보다 실루엣에 먼저 꽂힌다. 지난 19일 제53기 정기 주주총회장에 등장한 이 사장의 착장은 올해도 어김없이 하나의 선언문이었다.

구찌(Gucci) 울 블렌드 재킷과 슬랙스로 완성한 올 블랙(All Black) 수트. 그 안에서 존재감을 발한 것은 발렌티노(Valentino)의 코튼 블렌드 레이스 시스루 탑이었다. 견고한 블랙 테일러링 사이로 살짝 비치는 레이스 디테일은 경직된 권위 대신 ‘부드러운 리더십’을 암시하는 장치로 작용했다. 여기에 단종 모델인 에르메스(Hermès) ‘365 PM’ 토트백을 더해 과시보다는 클래식과 실용성 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켰다.

색채의 흐름은 정교하다. 2024년 흑자 전환 시점, 이 사장은 화이트 알렉산더 맥퀸 수트로 성장의 봉화를 올렸다. 이듬해 블랙 원피스로 위기 인식을 드러낸 데 이어, 올해도 블랙을 택했다. 인천공항 면세점 철수 위약금 등으로 당기순손실이 확대된 상황에서 6연임을 확정지은 그가 내린 선택이다. 수익성 중심 경영으로의 방향 전환을 옷으로 써 내려간 셈이다.

이마를 살짝 덮는 자연스러운 앞머리를 선택한 것도 눈길을 끈다. 기존의 단정하고 완고한 이미지에서 한 걸음 물러서, 유연하고 현실적인 리더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올해 글로벌 럭셔리 패션의 화두는 ‘파워 미니멀리즘’이다. 과장된 로고와 장식을 걷어내고 소재의 질감과 핏으로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콰이어트 럭셔리(Quiet Luxury)’의 심화 국면이다. 

이 사장의 올 블랙 수트는 그 흐름의 정점에 위치한다. 구조적인 어깨선과 슬림한 라인이 결단력을 시각화하고, 레이스 시스루 이너가 강경함을 희석시키는 구조다. 로고 없이도 에르메스 백 하나로 ‘내재된 권위’를 완성하는 방식은 젠더 뉴트럴 테일러링이 여성 리더의 이미지 전략으로 완전히 안착했음을 보여준다.

2028년까지의 ‘재도약’을 선언한 시점에서 이 사장이 선택한 올 블랙은 위기의 상징이 아니다. 절제와 집중, 그리고 구조적 체질 개선에 대한 의지를 압축한 전투복이다. 그 안을 채운 시스루 레이스는 강함 속에 유연함을 품겠다는, 가장 조용한 다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