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여름, 29년 동안 봉인돼 있던 투표함 하나가 열렸다. 상자 안에는 4,325장의 투표지가 들어 있었다. 조작이나 위조는 없었다는 결론으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당시 재개표를 주관했던 강원택 서울대 교수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왜 직접 재개표하지 못하고 정치학회에 이를 맡겼느냐는 것이었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을 거치며 만들어진 선관위는 권력으로부터 선거를 지키기 위해 독립성을 강화해왔다.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성벽을 두른 지 63년. 그 안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졌고, 선거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짚어봤다.
1987년 12월 16일, 16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가 치러졌다. 투표율은 89.2%에 달했다. 그런데 서울 구로구을에서는 시민들이 투표소를 빠져나가는 트럭 한 대를 막아섰다.
트럭 짐칸에서 발견된 것은 부재자 투표함이었다. 상자 안에서는 도장까지 나왔다. 경찰이 투입돼 천여 명이 연행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크게 다쳤지만, 해당 투표함은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국 개표되지 않았다.
29년을 건너뛴 재개표는 선관위 대신 ‘정치학회 주관’이라는 틀을 빌려 진행됐고, 조작은 없었다는 결론과 함께 선관위의 절차 문제도 함께 묻혔다. 취재진은 강 교수를 다시 만나, 그때 미뤄진 질문이 왜 10년 만에 되돌아왔는지 물었다.
선관위는 선거 때마다 선거인 수보다 적은 양의 투표용지를 인쇄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적용된 하한선은 선거인 수의 50%였다. 2009년 80%였던 기준은 이후 한 번도 상향되지 않았다.
취재진이 확보한 관련 자료에서 인쇄율을 낮춘 근거로 제시된 것은 예산 낭비와 투표용지 폐기 부담 등이었다.
직전 지방선거인 2022년 자료를 바탕으로 전국 1만4,465개 투표소에 50% 기준을 적용해 분석한 결과, 투표용지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는 투표소는 154곳이었다. 이 가운데 17곳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실제로 투표용지가 바닥났다.
사고 이후 진행된 선관위 자체 감사에서는 투표용지 인쇄율 결정 과정도 도마에 올랐다.
결정에 관여한 관계자는 자체 감사에서 “약간 서로 믿다 보니 발생한 일인 것 같다”고 답했다. 위원장은 현직 법관이고, 위원 상당수는 본업을 따로 두고 있어 선거 사무에 대한 전문성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 국정조사에서는 전 중앙선관위원장이 관련 결정에 대해 “기억이 안 났다”고 답했고, 송파구 선관위원장은 투표용지 인쇄율 50%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를 못 했다”고 말했다.
결국 전국 투표소에 배포되는 투표용지의 수량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어떤 구조 속에서 만들어졌는지가 문제로 떠올랐다.
선관위의 인력 구조 역시 취약점으로 지적된다.
상시 직원은 3,000여 명에 불과하지만 선거 때마다 전국 투·개표소에서 일하는 단기 인력은 40여만 명에 달한다. 선관위 직원이 투표소 현장에 상주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6월 3일 송파구선관위에서는 직원 13명이 단기 인력 약 2,900명을 총괄했다. 한 현직 직원은 “실수가 발생하지 않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선거 당일 투표소 담당자들이 참여한 단체 대화방에는 답변을 받지 못한 다급한 문의가 이어졌다. 대규모 선거를 관리하는 조직의 구조적 한계가 현장에서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같은 날 경기도 김포에서는 투표율 입력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구래동 9개 투표소에서는 한 시간 동안 투표한 사람이 모두 1명으로 기록됐다. 한 파견 공무원의 입력 실수로 오후 1시 이미 80%에 육박하는 투표율이 집계되자 김포시선관위는 상급 기관에 수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수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중앙선관위는 오히려 숫자를 다른 투표소에 분산해 입력하도록 했고, 수정할 숫자를 담은 엑셀 파일까지 내려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취재진이 직전 대선과 총선까지 살펴본 결과, 110여 곳에서 실시간 투표율이 실제와 다르게 입력된 정황도 확인됐다.
취재진은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일본 도쿄 오타구의 전직 선관위 직원, 그리고 투표용지 부족으로 총선 일부가 무효가 된 독일 베를린의 선거관리관을 만나 ‘은폐의 문법’을 물었다.
선관위에 대한 국민 신뢰도 역시 낮은 수준이었다.
KBS 미디어연구소가 전국 성인 남녀 2,12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선관위 신뢰도는 4점 만점에 평균 1.84점으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 10개 기관 가운데 8위로, 검찰과 언론보다도 낮았다.
이번 지방선거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응답은 44.1%로 공정했다는 응답 32.1%보다 높았다. 다만 지지 정당에 따른 격차는 컸다. 선거가 공정했다는 평가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에서 60.0%,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는 9.9%로 나타났다.
고의가 아닌 단순한 오류라고 하더라도 선관위에 대한 신뢰가 낮아질 것이라는 응답도 62.8%에 달했다.
선거의 공정성을 둘러싼 의혹이 실제 부정으로 확인된 것인지와는 별개로,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선관위가 풀어야 할 또 다른 과제로 남았다.
허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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