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롯데바라기’ 베르테르의 운명... 발하임에서 생긴 일 [리뷰]

이진주 기자
2025-01-31 11:34:14
|베르테르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 vs 롯데 “사랑과 우정 사이”
|엄기준X전미도, 클래식은 영원하다... 3월 16일까지 디큐브링크아트센터 공연

뮤지컬 ‘베르테르’ 캐릭터 포스터 (제공: CJ ENM)

시(詩)와 꽃이 있는 한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을 지어다. 적어도 낭만의 도시 발하임에서는 그렇다. 옆구리가 시린 겨울날이면 ‘베르테르’의 외사랑 이야기를 안 들어볼 수 없다. 순애가 독이 된 ‘베르테르’의 사연이 무려 25주년 하고도 12연의 무대로 관객을 찾는다.

뮤지컬 ‘베르테르’는 사랑의 작대기가 어긋난 남녀를 그린다. 독일 문학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베르테르’와 ‘롯데’, ‘알베르트’의 삼각관계와 더불어 주변인물 ‘카인즈’, ‘오르카’ 등의 갈등을 더해 비극을 극대화했다. 

극은 소설과 달리 장례식에서 출발한다. 바로 보는 결말에 재미는 반감될 수 있으나 그의 극단적 선택에는 반문을 품기 마련. 모름지기 사랑은 상대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 아니던가. 해서 ‘베르테르’의 순애에 대한 경외는 1부에 그친다. 순결은 휘발되고 보상에 절여진 자가 본위의 이데올로기적 사랑은 보나 마나 파국일 뿐. 내나 스스로를 좀먹기까지 하니 얼마나 허무한 청춘인가.

뮤지컬 ‘베르테르’ 전미도 공연사진 (제공: CJ ENM)

그를 향한 애도가 끝이 나면 첫 만남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장에는 ‘롯데’의 인형극을 보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젤을 갖고 나온 ‘베르테르’는 마음을 빼앗긴다. 초상화를 핑계로 가까워진 이들은 집까지 오가는 사이가 됐다. 마침 좋아하는 시인까지 같다니 이야말로 운명이겠다. 책 한 권도 정성스레 포장하며 “우리는 친구”란다. 그렇게 노랫말과는 모순되게 서로가 서로에게 시나브로 스며든 것.

미망인을 품은 정원사 ‘카인즈’ 덕에 고백을 결심한 ‘베르테르’는 잔인한 진실을 마주한다. 약혼자의 존재에 혼란스러운 그는 회피의 길을 떠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던데 좀처럼 포기가 안 되는 모양. 남몰래 열병을 앓은 끝에 다시 찾은 외사랑은 충동적이고 집착적으로 변질된다. 어느 지점에는 패배감, 고독감 등 잡다한 부정의 감정에 함몰되는 탓에 보는 이마저 속이 괴롭다.

여기서 ‘베르테르’는 해바라기로 치환된다. 만개한 꽃밭 무대는 첫사랑 당시의 호르몬처럼 활기를 부여하면서도, 원색으로 곧게 뻗은 이미지는 그의 위태로운 행보만큼 위협적이다. 종국에는 자결과 동시에 마지막 한 송이가 쓰러지며 상심을 더하는 장치로 역할하지만 그의 업보를 변호하기에는 설득력은 어렴풋하다.

그럼에도 파란 엉덩이와 빨간 보조개, 금단의 꽃, 보리수나무 등 갖가지 식물과 온실정원은 눈요기를 제공한다. 이는 ‘롯데’가 더욱 사랑스럽게 비치는 이유겠다. 또 ‘하룻밤에 천년’, ‘달빛산책’ 등 피아노와 현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감미로운 선율은 동화 같이 촉촉한 울림이 되어 어우러진다.

뮤지컬 ‘베르테르’ 엄기준 공연사진 (제공: CJ ENM)

‘베르테르’의 고유명사로 통하는 엄기준은 일곱 번만큼 더 괴테스럽게 농익었다. 그녀 앞에서는 한없이 주뼛거리는 빙구미로 미소 짓게 하다가도, 자신은 지고지순한 사랑인 양 구애하는 모습은 스토커나 진배없다. 특히 ‘뭐였을까’ 넘버는 첫눈에 반한 남자가 고백이 좌절된 순간 이토록 섬뜩하고 처절할 수 있는지를 납득시킨다. 더한 불상사를 상상케 하는 그의 연기에 타이밍적 아쉬움보다는 되레 안도감이 앞서기도.

10년 만에 ‘롯데’로 분한 전미도는 변함없이 해사하다. ‘자석산의 전설’에 푹 빠진 맑은 영혼이며, 미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호들갑이며, 남녀노소 사르르 녹일 반달 눈웃음이며, 옥구슬이라도 믿겠는 목소리에 어느 누가 반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베르테르’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게 만드는 무구한 매력이 두 시간 내내 이어진다. 콩깍지가 필요 없는 비주얼에 심연을 후벼 파는 호연은 지금 아니면 보지 못할 것.

‘알베르트’ 뉴캐스트의 임정모는 서브 남주로서 합격점이다. 이층 세트에서 선물과 함께 등장한 그는 단숨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타고난 거구와 저음의 콜래보로 캐릭터를 뚝딱 만들어내더니 ‘베르테르’와 상반된 분위기로 몰입감을 배가한다. 게다 훼방꾼이 얄미울지언정 동요하지 않으려는 남자 중의 남자 아닌가.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사려 깊은 내면과 한 여인만 품는 뚝심은 남주 순위를 뒤집기 충분하다.

한편 뮤지컬 ‘베르테르’는 신구 조합으로 눈길을 끈다. 기존 캐스트의 엄기준, 전미도, 이지혜에 양요섭, 김민석, 류인아가 새롭게 합류했다. 오는 3월 16일까지 디큐브 링크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인터미션 20분 포함 러닝타임 165분. 8세 이상 관람가.

이진주 기자 lzz422@bn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