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왕비 명성황후의 130주기를 기념해 또 하나의 역사를 이어갈 뮤지컬 ‘명성황후’가 개막했다. 30돌의 프로그램북은 두께부터 별다르다. 다수의 수상 내역과 22연의 프로덕션 히스토리가 빼곡하다.
무속정치로 조선의 멸망을 앞당긴 주역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오랜 동안 사랑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민비의 비선 실세로 알려진 무당 진령군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민초의 혐오 대상이기 전에 일본에 의해 최후를 맞은 국모 민자영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96년 히로시마 지방법원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 미우라 고로에 대한 재판이 한창이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무죄 방면. 그렇게 을미사변이 어이없게 막을 내리며 ‘명성황후’가 시작된다.
‘명성황후’의 상징과도 같은 원형 회전 세트가 쉴 틈 없이 돌아가며 19세기말 조선의 긴박한 정세를 그린다. 그 속에서 서구 열강들의 침입, 유산 끝에 겨우 얻은 세자, 대원군의 섭정과 고종의 친정, 민씨 가문의 몰락, 일본 낭인들의 여우사냥 모략, 개화정책과 사절단 연회, 호위무사 홍계훈의 사모의 정, 미우라 공사의 알현과 왕비의 최후를 단 50곡에 녹여냈다.
특히 ‘무과시험’과 ‘살생의식’은 극과 극 매력의 칼군무로 짜릿한 쾌감을 자아내며, 총을 활용한 전투‧훈련씬은 탄발 소리와 화약 냄새로 실감을 더한다. 국악기와 사물악기가 어우러진 ‘수태굿’은 삼엄한 기세로 혼을 쏙 빼놓고, 대형 욱일기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정한회의’는 강렬한 인터미션을 알린다.
새롭게 추가된 ‘운명의 무게를 견디리라’는 고종과 왕비, 홍계훈의 삼중창이 돋보이는 넘버로, 저마다의 인간적 고뇌를 노래한다. 여기에 왕비의 수준급 불어 실력과 세자의 귀여운 잠투정이 무거운 공기가 가라앉을 즈음 균형을 맞춘다. 또 용상이 불편해 보이는 종이호랑이 신세의 고종도 한숨이 나올 만큼 잘 표현했다.
죽어서도 조국을 향한 비장한 결의가 깃드는 명성황후의 피날레 장면은 배우의 역량을 제대로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소프라노 김소현의 성악 차력쇼는 개운하면서 벅찬 경험을 선사한다. 맹렬한 울대의 떨림마저 생생하게 느껴지는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이 백미다.
왕비는 백성들과 함께 핏대를 세워가며 부르짖는다. “이 나라 지킬 수 있다면 이 몸 재가 된들 어떠리. 백성들아 일어나라… 용기와 지혜로 힘 모아 망국의 수치 목숨 걸고 맞서야 하리.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하리. 조선이여 무궁하라 흥왕하여라” 통한이 서린 ‘백성이여 일어나라’ 합창에 관내도 눈물바다를 이룬다.
지난달 31일 공연은 ‘뮤지컬 부부’로 유명한 손준호와 김소현이 조선 왕조 26대 고종과 명성황후로 분했다. 두 사람은 2018년부터 페어로 호흡하고 있는 만큼 죽이 척척이다. 꿀도 깨도 쏟아지는 눈빛으로 부러움을 사는가 하면, 어린 세자 김민준을 살뜰히 챙기며 가족적 케미를 완성했다.
이번 공연은 두 사람을 비롯해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타이틀롤은 물론 앙상블까지 연기구멍은 찾아볼 수 없는 레전드들로 무대를 꾸렸다. ‘명성황후’ 역은 김소현과 신영숙, 차지연이 책임지며, ‘고종’ 역은 손준호, 강필석, 김주택이 맡았다. ‘홍계훈’ 역에는 양준모와 박민성, 백형훈이 이름을 올렸다.
이진주 기자 lzz422@bntnews.co.kr